이종일 (18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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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종일은 1858년 충청남도 태안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이다. 1873년 과거 급제 후 개화파 관료로 활동했으며,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하고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에서 연사로 활동했다. 대한제국민력회를 조직하고, 흥화학교와 국문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교육에도 힘썼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25년 영양실조로 사망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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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일 (185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한글 | 이종일 |
한자 | 李種一 |
로마자 표기 | I Jong-il |
인물 정보 | |
출생일 | 1858년 12월 10일 |
출생지 | 충청남도 태안군 |
사망일 | 1925년 8월 31일 |
직업 | 언론인, 독립운동가 |
종교 | 천도교 |
상훈 | [[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년) |
웹사이트 | 이종일(독립유공자 공훈록) |
2. 생애
충청남도 태안군 출신으로, 1873년 과거에 급제한 뒤 개화파 관료로 활동했다. 1882년 수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개화 사상을 받아들였다. 1896년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하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제국신문》, 《대한황성신문》 등을 통해 언론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보성보통학교 교장, 흥화학교 및 국문학교 설립 등 교육 사업에도 힘썼다.
1905년 천도교에 입교한 후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등 애국계몽운동 단체에 참여했다. 한일 병합 이후에는 천도교 조직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모색했으며,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인쇄소 보성사 사장을 맡았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기미독립선언서 인쇄와 배포를 책임졌고, 이로 인해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
출옥 후에도 제2의 독립선언을 시도하고,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을 맡아 한글 맞춤법 연구에 기여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으나, 1925년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
2. 1. 초기 활동
성주이씨 이교환(李敎煥)의 아들로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1872년 상경하여 1873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개화파 관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82년 8월에는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에 갈 때 사절단 일원으로 수행하여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 문물을 직접 보고 영향을 받았다. 이후 유교 사상에서 벗어나 실학과 개화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1898년 이전까지 내부주사, 중추원 의관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이후 학부의 국문연구소(정3품) 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1894년에는 보성보통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교육 사업에 전념했다. 또한 민영환과 함께 흥화학교를 세웠고, 1902년 2월에는 김가진, 지석영과 함께 국문학교를 설립하는 등 의무교육 실시와 교육 기회 평등을 강조하였다. 1898년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으나 약 10개월 만에 사퇴하였다.
1896년 서재필, 윤치호, 주시경 등과 함께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하여 필진의 한 사람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연사로 활동하였다. 1898년 3월 개화운동 단체인 대한제국 국민력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이승만 등이 창간한 경성신문에 1898년 3월부터 논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1899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되자 언론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후 이승만 등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고 필진으로 활동했으며, 《대한황성신문》 사장을 맡아 언론계에서 활동했다. 이 외에도 대한자강회에 참가하는 등 개화 사상에 기반한 계몽 운동에 활발히 나섰다.
1898년 7월 25일 황제 고종의 탄신 경축 기사에서 '성수만세(聖壽萬歳)'가 '성수망세(聖壽亡歳)'로 잘못 기재되어 불경죄로 투옥되었으나, 타인의 조작으로 판명되어 곧 풀려났다.
2. 2. 독립 운동
1905년 12월 홍산 최학래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다.[1] 손병희와는 제국신문 창간 당시부터 교분이 있었다. 윤치호, 윤효정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에도 참여하였다.[1]1906년 9월 대한자강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하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1] 대한자강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후에는 후신 조직인 대한협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1907년 11월).[1] 한일 합방 조약 이후에는 천도교 월보사 부장으로 활동하며 종교 활동에 전념하였다.[1] 또한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천도교 월보과장(月報課長)과 보성 인쇄주식 회사(보성사) 사장을 역임했다.[1]
1912년부터 천도교의 재정과 신도 수, 전국적 조직망 등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1] 이는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1904년 갑진년 개화 신생활 운동의 정신을 이어 1914년 갑인년에 대대적인 민중 운동을 일으키려 한 것으로 '삼갑운동(三甲運動)'이라 불렸으나, 사전에 계획이 발각되어 실패하였다.[1] 또한 임예환, 이종훈에게 지시하여 일제의 경제 수탈로 인한 농어민 피해 실태 조사를 벌였고, 이 결과를 토대로 보성사 사원 6여 명과 함께 범국민 신생활 운동을 추진하였다.[1] 1914년 10월 31일에는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았으며, 총재에는 손병희가 추대되었다.[1]
1914년 8월에는 천도교 내 비밀조직인 '천도구국단'을 결성하여 단장에 취임하였고, 손병희를 명예총재로 추대했다.[1] 이 조직은 독립 이후 국가 건설에 대비한 준비 기구의 성격을 가졌으며, 훗날 3·1 운동의 모태 중 하나가 되었다.[1] 1918년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와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의 독립 선언에 영향을 받아, 이종일은 손병희에게 독자적으로라도 시위 운동을 벌이겠다고 주장했다.[1] 같은 해 9월 9일을 거사일로 잡고 시위 운동을 계획했으나(무오 독립시위 계획), 선언서 작성 미비, 원로 교섭 지연, 자금 부족, 민중 동원 조건 미성숙 등의 문제로 미수에 그쳤다.[1]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1] 당시 천도교가 운영하던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 사장을 맡고 있었는데, 거사 열흘 전부터 기미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는 중책을 맡았다.[1] 당시 보성사는 최신식 인쇄 기술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종일은 이곳에서 천도교의 월보(月報)를 펴내고 있었다.[1] 독립선언서는 당초 이종일이 작성할 계획이었으나, 평소 그의 과격한 언행 때문에 최남선이 작성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1]
이종일은 독립선언서 인쇄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최남선과 함께 이승훈을 통해 기독교 대표들과의 연결을 주선하는 역할도 하였다.[1] 3·1 운동 당시 보성사에서 사비를 들여 기미독립선언문 유인물 3만 5천 부를 인쇄하여 배포하였다.[1] 이 일로 체포되어 공판에서 민족대표 중에서도 주동 인물로 지목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했다.[1]
2. 3. 생애 후반
출옥 직후인 1922년 3월 1일, 3.1 운동 3주년을 맞아 천도교 신자들과 보성사 직원 50여 명과 함께 제2의 3.1 운동 기념식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2월 20일에 직접 제2의 독립선언문인 자주독립선언문 초고를 작성하고 김홍규에게 인쇄를 맡겼으나, 태안경찰서 직원의 감시로 사전에 발각되어 인쇄물은 모두 압수당했다.이후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을 맡아 한글 맞춤법을 연구하는 등 한글학자로서 활동하였다. 또한, 또 다른 독립 만세 시위를 기획하며 저서 《한국독립비사》를 집필하였으나 이 역시 일제에 의해 압수되었다. 그 외 저서로는 1919년부터 1922년까지의 기록을 담은 《옥파 비망록》을 남겼다.
말년에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끼니를 제대로 잇기 힘든 생활을 하다가, 1925년 8월 31일 경성부 죽첨정 1정목 31번지 자택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3. 사후
서울 미근동 공립보통학교에서 사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고, 아현리 화장장에서 화장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1936년 5월 17일 손녀 이장옥과 친척 이종린 등에 의해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78년 이종일기념사업회가 발족하였으며, 1986년 생가 터가 복원되었고[7][2], 2009년 8월 생가 터에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태안의 충애사(忠愛祠)에 영정이 안치되었다.[8][3]
그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제2의 독립선언문은 구전으로만 전해지다가, 1979년 2월 27일 묵암기념사업회(회장 이병도) 소속 이현희 교수가 묵암비망록에서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다.[9][4]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서울 종로구 조계사 뒤편 옛 보성사 터(수송공원)에 이종일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4. 저서
- 한국독립비사
- 옥파 비망록
5. 가족 관계
동아일보 1936년 5월 17일자 3면에 그의 손녀 이장옥에 대한 소개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할아버지 이종일이 감옥에 있을 때 아버지(이종일의 아들)가 먼저 사망했고, 이장옥은 서조모(할아버지의 첩)와 서모(아버지의 첩)의 손에서 자랐다고 한다.[10][5]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아버지 | 이교환(李敎煥) | 1841년 10월 20일 ~ 1878년 1월 16일 | |
부인 | 이씨(李氏) | [11][6] | |
아들 | 이학순(李學淳) | 1885년 7월 27일 ~ 1925년 3월 27일 | |
며느리 (첩) | 이름 미상 | 아들 이학순의 첩[10][5] | |
손녀 | 이장옥(李璋玉) | 1904년 ~ ? | |
손녀 사위 | 이운서(李雲瑞) | ||
첩 | 이름 미상 | [10][5] | |
동생 | 이종칠(李鍾七) | 1861년 8월 24일 ~ 1909년 3월 14일 | |
조카 | 이영순(李永淳) | 1899년 11월 19일 ~ ? | 이종칠의 아들 |
조카 | 이용순(李龍淳) | 1902년 3월 8일 ~ ? | 이종칠의 아들 |
동생 | 이종팔(李鍾八) | 1873년 3월 25일 ~ 1914년 1월 11일 | |
조카 | 이익순(李益淳) | 1897년 12월 4일 ~ ? | 이종팔의 아들 |
조카 | 이형순(李亨淳) | 1905년 11월 19일 ~ ? | 이종팔의 아들 |
친척 | 이종린 |
6. 기타
친척인 이종린 역시 천도교 신자였으며, 경성부(현재의 서울)에 거주하면서 권동진의 문하생으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1995년 4월 이종일을 '이 달의 독립 운동가'로 선정했다. [http://narasarang.mpva.go.kr/data/downloadFile.asp?filename=monthhero\199504.hwp (상세자료)]
참조
[1]
웹사이트
이종일(李鍾一)
http://encykorea.aks[...]
2022-08-2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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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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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4
[3]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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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aean.go.[...]
태안군청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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